몰트만이 다시 방한했다. 한신대에서 그를 초청했으니 민중신학 얘기를 안 할 리 없었다. 해방신학자 소브리노의 The Principle of Mercy를 소개하며 글말미에 우리의 민중신학에 대한 내 생각을 한 줄 썼었는데, 2009/04/24 - [신학] - 소브리노의 자비의 원리
이번에 몰트만도 이런 얘기를 했다. 뉴스앤조이 기사를 일부 옮기면 이렇다.
몰트만 박사는 안병무 박사를 회상하면서 “민중에 대한 복음의 의미를 발견해 한국 신학과 교회에 민중운동을 일으켰다”고 평가했다. 안 박사가 예수는 민중을 위해 죽임을 당하고 민중은 예수를 위해 죽임당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안병무 박사가 “민중이 세상의 죄를 지고 그의 고난으로 세상을 구원한다”고 말한 것에 몰트만 박사는 다른 견해를 피력했다. 몰트만 박사는 “민중이 세상을 구원한다면 누가 민중을 구원하는가. 민중은 고난을 당하기보다 고난을 극복하려고 하고 고난의 의미를 해석할 수 없다”고 했다.
학교 다닐 때 몰트만 얘기 많이 하고 또 그만큼 많이 들었다. 몰트만이 유명해진 이유.... 그분 책을 우리말로 읽을 수 있어서다. 아님 말고... ^^ 어쨌든 몰트만을 입신양명케 한 [희망의 신학]은 멋진 책이다. 몰트만의 희망이 뭘까? 한 번 정리해 놓아야지 싶어서 써 놓은 것을 오늘 다시 읽는다.
공부하고 싶다. 학위 말고 공부를 하고 싶다. 아니 좀 더 진솔하게는 님도 보고 뽕도 따고 싶다. 더 솔직해진다면, 외로운 내 스승에게서 행정적 및 공식적으루다가 공부하고 싶다. ^^ 스승이 다시 복직되든, 다른 학교에 자리를 잡든 둘 중 하나는 되었으면 싶다. 스승이 해직된 지 벌써 10년이다. 옛날 어느날 김찬국 교수님의 약력을 본 적이 있다. 김찬국 교수님이 아닐 수도 있지만 내 기억에는 그분 맞다. 그분이 학교에서 해직당하고 약 7년 만에 복직되셨던 약력을 봤다. 그때 나는 그분이 7년동안 어떻게 버텼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런데 내 스승은 10년이 찼다. 강산이 변해야 되는데 그래야 외운 고사성어가 참 가치를 발할텐데, 아직 임계점이 안 왔는지 맹탕하다. ^^ 언젠가 나는 포옴나게 기도했다. 스승의 복직과 내 신학함을 함께 묶겠노라고. 그래서 그런지 나는 아직도 이 모양 이 꼴이다. ^^ 하지만 내 기도를 들으셨고, 듣고 계시고, 앞으로도 들으실 주님은 나와 스승에게 가장 좋은 것을 베푸실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긴다. 난 아직 신앙이 어린지(오렌지 아님...^^) 예수님처럼, 본회퍼처럼 상황이 바뀐 것 없이 그냥 이대로 끝나버리면 어쩌나 싶을 때도 있다.
희망의 해석학이라고 제목을 붙이니 거창해 보인다. 본시 쩍쩍 신앙을 무시하면 안 되듯, 학문할 때는 학학(하악하악....ㅎㅎ) 해야 포옴난다. ^^
1. 약속 몰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약속의 말씀이다. 그에 의하면, “약속은 말의 행위”로서 약속하는 사람 자신을 통하여 보증되는 확약이며, 약속하는 사람은 그의 말을 “지키며” 그가 약속한 것을 실행해야만 하는 의무를 자신에게 부과한다. 그런데 몰트만에 따르면, 하나님의 약속은 율법의 형태 속에 있는 약속이다. 그래서 몰트만은 이 약속을 계약의 한 면이라고 말한다. 몰트만은 약속의 법적인 면을 하나님의 선택에서 발견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선택하시고 계약을 맺을 때, 약속과 계명이 주어진다. 그러므로 약속과 계명(율법)은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몰트만은 “복음의 형태 속에 있는 약속이 약속과 결부된 명령으로서의 율법의 근원적인 의미를 다시금 드러내는 것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고 전망한다. 따라서 몰트만은 율법의 본래적 정신은 복음이라는 점을 간과하지 않는다. 그래서 몰트만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약속은 계명이고, 동시에 복음이다.
2. 약속의 미래적 지평으로서의 희망 몰트만은 약속의 종말론적 지평을 궁극적 지평(성취)의 의미에서 찾는다. 왜냐하면 약속은 성취의 미래를 지향하고, 이 성취의 미래는 약속과 함께 말해지기 때문이다. 이에 근거하여 몰트만은 예언자적 종말론을 이스라엘의 약속 신앙의 토양에서 찾는다. 그러므로 몰트만에 의하면, 예언자들에게서의 하나님은 약속의 미래적 지평으로서의 희망의 하나님(Deus spei)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신앙이 이미 약속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신앙은 미래적인 분이신 약속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몰트만에 의하면, 희망은 약속의 종말론화이다. 그런데 몰트만에 의하면, “약속의 종말론화”는 한 개인에게, 혹은 이스라엘 민족에게서만 끝나지 않고, 야웨의 심판의 날을 통해 모든 민족에게로 확장된다. 이것이 “약속의 우주화”이다.
3. 희망의 해석학 몰트만에 의하면, 적어도 예언자들의 메시지에서 종말과 창조는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취의 미래로서의 종말은 약속으로서의 창조의 목적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약속으로부터 기대되는 희망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러므로 몰트만의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미래로부터 도래하시는 사건으로 해석된다. 이를 통하여 몰트만은 “희망”을 구체화한다. 그는 역사의 종국으로서의 희망의 미래로부터 역사 내지 현재를 해석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희망의 미래는 현실 세계에 내재해 있는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한다. 따라서 몰트만에 있어서 역사 참여와 변혁을 위한 실천이 바로 희망의 해석학이요 그 실천이다.